[Keqi] Never Ending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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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qi ( Vote: 252 )

나는 영어를 그리 잘 하지 못하네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날 보고 그렇게 말하네
"영어 잘 하시네요"
어학당에서는 날 보고 선생이 이렇게 말하네
"... your vocabulary is excellent ..."

그런데 말일세

매킨지에 시험을 보던 시절의 일일세
당시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난 2차 인터뷰까지 진출했지
4번째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일세

컨설턴트에 대한 꿈은 있었네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덤빈 것 치고는 아주 놀라운 결과였네
곁에서 지켜보던 우니구니나 다른 벗들의 반응도 그랬고
나 역시도 점점 그 결과에 어느덧 고무되고 있었네

4차 시험이 있던 날은 한국과 미국의 월드컵 경기가 열리던, 바로 그 날일세
6월 10일 오후 한 시 삼십 분,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매킨지 사무실 안이었네

분명 영어 인터뷰를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영어회화에는 전부터 자신을 가지고 있었네
물론 군에 있는 동안 영어의 맛을 잃어버린 것도 있었지만
원어 수업을 내가 자원해서 들어가고, 그 안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법을 배웠네

그런데 말이지
난 거기서 얼어붙었어

revenue.

한 마디를 잘못 알아들어버린 거지
그리고 그 한 마디를 잘못 대답한 거지

인터뷰는 이상하게 꼬여 갔고
컨설턴트는 긴장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네
"Unfortunately, we have to stop in here"

물론 그것이 평가에서 제외된다는 말과 함께
한국어 인터뷰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지만
난 더 이상 평정을 찾을 수 없었네

그 이후로 난 영어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네
내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언어에 대한 자존심
누구보다 빨리 배울 수 있고,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그 알량한 내 신화는 그렇게 무너졌네

그리고 학원을 몇 군데 전전하면서 내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졌네
그나마 지금은 "upper intermediate"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긴 하네만
영문과 출신으로서 그건 수치일세

한 편으로 보면, 그건 당연한 결과지
영문과를 전공하면서 난 원서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네
vocabulary가 박약했거든
그래서 비평을 택했고, 그래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지

난 영어를 대학 들어와서 공부한 적이 없네
내 아버지가 그렇게 단어를 무식하게 외우라는 게 싫었고
외고 시절의 그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싫었고
그깟 글 따위 읽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는 것 때문에 그랬네

한 단어를 알아듣지 못함으로 인해 난 연봉 수천만원의 직장을 잃었네
물론 지금은 열심히 내 직장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네만
적어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수치심일세

"Your aim is too high"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일을 당하고 난 뒤의 나는 달라졌네
그런 꼴 두 번은 당할 수 없네
그래서 영어공부 계속하는 걸세

나도 직장 끝나고 남들처럼 기분 좋게 한 잔 걸치고 싶네
매일 시간 걱정 안 하면서 동기들하고 이야기도 하고 싶고
집에서 시켜주는 맞선이든 동기가 소개시켜주는 소개팅이든
좋은 사람도 만나고 연애도 하고 싶네

그런데 그럴 시간이 내게는 없네
두 번 다시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힘들어도 참아야 하니까

"Your listening is fine"
그런 꼴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잘 들어야 한다네
이것 가지고는 너무도 모자라

"Some of your vocabulary is excellent"
내 컴플렉스 중 가장 큰 것이 어휘에 대한 것이거늘
upper intermediate가 아니라, native와 같은 영어가 필요한 데 말일세

내 목표가 너무 높아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내 게으름과 나태로 인해 날려버린 기회만큼
난 그 곱절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누

그러나 난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네, 친구
"You have obviously been trying very hard"
이 말을 듣기엔 낯 뜨거울 정도로 민망할 뿐이야
난 그 놈의 단어조차도 여전히 외우지 않거든

여전히 난 산만하고, 여전히 난 게으르고, 여전히 입만 살았어

그런데 말이야, 친구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어
매일 새벽 일어나 라디오를 들으며 새벽길을 재촉하고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을 하루라도 재밌게 만들려고 노력하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거기다 주말에도 여기저기 왔다갔다
피로로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맘만은 늘 행복하고 즐거웠다네

그런데 요즘 말야
난 술이 정말 싫어져
사람들의 혀가 무서워지고

아버지 가죽옷 입고 회사 나오는 게 그렇게 죽일 죄인가
술 좀 덜 먹고, 덜 노는 게 그렇게 흉인가
여자한테는 말도 걸지 말라는 말인가

집에 잘 붙어있지도 않은 무시무시한 내 아버지 옷
늘 아프다고 한쪽 구석에서 싸매고 누워있던 내 어머니 옷
나 그런 거 물려입고 자랐네

연필도 몽당연필 될 때까지 쓰고
궁상맞은 뻘짓거리 다 하고 살았네, 아니, 지금도 그러네

그런데 뭐 어쩌란 말인가
내 죄라면 그저 내 부모가 하는 거 딴죽 안 건 죄 밖에 없고
그저 두 내외 말 잘 들은 죄밖에 없네
내 여자에게만큼은 나같은 슬픔 물려주지 않으려고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공부한 죄밖에 없네
하루빨리 졸업하고 취직해서 독립하려고
설날에도, 추석에도 나가서 일한 죄밖에 없네

한 달에 월급 절반 털어 적금 넣고
얼마는 두 내외 용돈 드리고
그리고 남은 돈으로 이것저것 챙기고 하다보면
하루에 만 원 쓰는 게 벌벌 떨리네

식권 모아서 궁상맞게 치약이니 면도기니 사오는 거
넘들 눈에는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난 평생 적자를 면할 수 없네

택시 한 번 타고나면 두 끼를 굶어야 하네
그래도 난 차라리 굶을 지언정 택시를 타네
그게 내 사는 방식이고 그렇게 해서 난 지금껏 버텼네

난 나를 꾸밀 줄 모르고, 날 가꿀 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네

나 역시도 "창자를 어쩌구" 하는 식으로 험하고 거친 말을 많이 쓰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 가슴에 피멍을 만들고 응어리를 만들지는 않네
분을 삭힐 곳이 없으니 그리라도 안 하면 내 속이 타서 죽고 말테니

비즈니스맨의 기본은 깔끔한 외모라지
하지만 적어도 난 20년 된 내 아버지 옷 물려입고 회사 가는 거
그거 부끄러워 해본 적 없네

남에게 거부감 안 줄 정도의 단정한 차림으로 가서 일 열심히 하면
그걸로 모든 건 용서된다고 생각하네
어차피 되는 사람은 뭘 걸치고 있든
그 안의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준다고 믿네

적어도 그것이 죄가 된다면
이 세상은 정말 뭐가 많이 잘못된 거지

앞으로는 덜 youyisu 하더라도 공부 좀 더 해야겠네
옷 살 생각도 해 봤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함께 술 한 잔 기울일 시간이 더 줄어들겠군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는 말게
지금의 고생을 딛고 좀더 나은 시간을 만들면
그 때는 정말 우리의 젊은 날을 안주 삼아 맛있게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을테니

4335. 12. 03.

지금도 어느 정도는 유효하다 생각되므로 소개글에 갈음함.

본문 내용은 7,98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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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11/06/1999 04:17:00
Last Modified: 02/27/2025 10:19:48